비 오는 516도로, 별이 된 배우, 그리고 아내의 스무 살
2026. 1. 6. 비 내리는 서귀포에서기름값이 무서워 보일러도 마음껏 틀지 못하는 겨울입니다.
아들과 단둘이 남은 집, 안방침대에 전기장판 하나만 켜두고 잠을 청했습니다. 코끝이 시린 새벽 공기에 눈이 떠졌습니다. 오늘은 아내의 CT 검사가 있는 날입니다.
걱정되는 마음에 새벽 미사를 드리고, 아들 녀석 아침밥을 챙겨주고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마음은 천근만근 심란한데, 차창 밖 풍경은 야속하게도 운치가 있습니다. 추적추적 이슬비가 내리는 제주. 큰길 대신 사려니 숲길을 지나 516도로를 탔습니다. 구불구불한 숲길 위로 짙은 안개가 내려앉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마주한 아내의 얼굴이 흙빛입니다.
아침 7시, 교수님과 함께 확인한 CT 결과가 지난주보다 좋지 않다고 합니다. 가라앉은 병실 공기 속에서, 아내가 무심한 목소리로 뉴스를 전했습니다.
"여보, 안성기 씨가 돌아가셨대."
제가, 아니 우리 세대가 가장 사랑했던 국민 배우. 수많은 명작이 있지만 제 마음속 1번은 언제나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였습니다. 한 서른 번은 돌려본 것 같습니다. 그 콧날 시큰해지는 짠함이란.
"비와 당신...
이젠 당신이 그립지 않죠. 보고 싶은 마음도 없죠.
사랑한 것도 잊혀 가네요. 조용하게."
- 영화 <라디오 스타> OST 중

특히 마지막 엔딩, 비 오는 날 박중훈 씨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묵묵히 웃어주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거짓말처럼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그는 별이 되어 떠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병원으로 오는 길, 안개 낀 516도로에서 영구차를 두 대나 마주쳤습니다. 평소라면 무심히 넘겼을 풍경이, 아내의 나빠진 검사 결과와 배우의 부고를 듣고 나니 가슴에 턱 하고 걸립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예고도 없이 와이퍼 사이로 끼어든 기분이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제가 군대를 다녀와 복학했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서로 알고, 부대끼며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27년. "징하게도 오래 봤다" 농담처럼 말하곤 했지만, 오늘 문득 떠난 배우를 생각하니 <라디오 스타> 속 매니저와 가수의 끈끈함이 딱 우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를 빛나게 하는 사이, 연애인과 매니져, 그리고 남편과 아내도 서로를 빛나게 해주는 그런 사이같습니다.
죽음이 슬픈 이유는, 떠나는 사람의 두려움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남겨진 사람이 떠난 이의 기억을 오롯이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 무게가 가장 가혹하고 슬픈 일이 아닐까요. 부부의 연이라는 것도 결국 그런 기억의 무게를 나누는 일일 테고요.

주름진 얼굴 위로, 27년 전 발랄하고 싱그러웠던 20대의 얼굴이 겹쳐 보입니다. 우리는 늙어가지만, 서로의 기억 속에는 가장 빛나던 시절의 모습이 박제되어 있나 봅니다.
나이가 들어도 부부가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상대방의 눈동자 속에 여전히 20대의 내가, 그리고 당신이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죽음은 산 사람에게 기억을 남기는 일이고,
부부의 인연은 서로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기억하며 10년, 20년, 그렇게 30년을 더해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떠난 배우의 명복을 빌며, 비 오는 창밖을 봅니다.
집에 돌아가면 먼지 쌓인 앨범을 꺼내봐야겠습니다. 고단한 현실에 가려져 있던, 내 아내의 가장 예뻤던 스무 살을 다시 한번 만나봐야겠습니다.
가장 젊고 예뻤던 시절을 기억해 주는 밤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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